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기록하며 살아갑니다. 매일 사진을 찍고, 텍스트를 남기고, 그 기록을 누군가와 공유하기 위해 필터를 입히고 해시태그를 달고, 업로드를 합니다.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멋진 풍경을 보면 먼저 스마트폰을 꺼내고,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먼저 촬영을 합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시대. 그러나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나는 여행을 하는 걸까, 아니면 기록을 위한 무대를 돌고 있는 걸까?
그래서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새로운 여행자 유형이 있습니다. 바로 ‘SNS 없는 여행자’. 이들은 사진을 찍지 않고, 공유를 하지 않으며, 기록마저 남기지 않는 선택을 합니다. 이 글은 그런 사람들의 여행 이야기입니다. 조용히, 그리고 깊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떠나는 무기록 여행. 기록 없는 자유의 경험이 우리에게 무엇을 되돌려주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려 합니다.
1. 우리는 왜 모든 것을 기록하려 할까
기록은 원래 기억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나만의 추억을 담기 위한 앨범, 일기, 손편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SNS의 시대가 오면서 기록은 곧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가 되었습니다. ‘좋아요’를 많이 받을수록 기록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믿게 되었고, 여행은 그 전시장을 위한 콘셉트가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봐도 ‘이걸 어떻게 찍어야 예쁠까’를 먼저 고민하고,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어떤 구도가 좋을까’를 떠올립니다. SNS 없는 여행자들은 이런 감각의 전환을 지적합니다.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을 찍는 대신, 그 자리에 머물고 싶었다"고, "어떤 것도 남기지 않으니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말합니다.
기록의 과잉은 결국 감각의 축소로 이어집니다. 눈으로 본 장면을 렌즈로 대체하고, 손으로 만질 시간을 화면 넘김으로 바꾸며, 마음으로 느낄 여백조차 '게시물로 남길 스토리'로 소비해 버립니다. 그런 시대에 기록하지 않는 여행은, 어쩌면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2. SNS를 끄고 떠난 사람들 – 기록이 없는 순간의 감정들
실제로 기록 없는 여행을 선택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감각이 되살아났다’고 말합니다. 필자는 몇 해 전, 제주도로 3박 4일 여행을 떠나면서 SNS를 삭제하고, 카메라 대신 작은 수첩만을 들고 갔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시선이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풍경을 눈으로 직접 담으려 하자, 사소한 디테일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돌담 너머 핀 들꽃, 멀리 울리는 파도 소리, 카페의 빛 그림자까지도 예민하게 감지되었습니다.
또 다른 여행자 이현지(33세) 씨는 베트남 하노이 여행 중 휴대폰을 꺼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처음엔 불안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고, 친구들이 나를 잊어버릴까 봐 두려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자 마음이 느긋해졌고, 길거리 커피를 마시는 현지인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우연히 만난 한국인 여행자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들이 사진보다 훨씬 진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기록 없는 여행은 '결과물'이 없습니다. 돌아와서 보여줄 사진도 없고, SNS에 올릴 게시물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생긴 감정은 오히려 더 오래, 깊게 남습니다. 기록을 위한 시선을 거두면, 감정은 내 안에 더 진하게 스며듭니다.
3. 국내에서 실천 가능한 무기록 여행지
① 경북 영양군 – 별을 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기
영양은 국내에서 가장 별이 잘 보이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시의 소음과 불빛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는 사진보다 감정이 더 또렷합니다. 특히 영양 별빛마을 캠핑장이나, 수비면 일대는 밤이 되면 휴대폰조차 켜고 싶지 않은 고요함이 펼쳐집니다. 찍을 필요 없이, 그 자리에 머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② 전남 강진 – 다산초당과 차밭 사이의 침묵
강진은 조용한 여행이 어울리는 도시입니다.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 차밭 언덕을 걷는 시간. 스마트폰 없이, 음악도 없이 걷다 보면 나의 호흡, 땅의 냄새, 바람 소리만이 함께합니다. 인스타용 사진이 하나도 남지 않더라도, 마음 안에 담긴 이미지들은 오히려 더 생생합니다.
③ 강원 양구 – 두타연과 민통선 마을의 고요함
접경지역 특성상 인터넷 신호가 약한 양구 두타연 일대는 자연스럽게 '디지털 차단' 상태가 됩니다. 인터넷이 느리고, 검색이 되지 않으니 풍경을 더 많이 바라보게 됩니다. 카메라 대신 눈으로 기록하고, 게시물 대신 내 기억 안에 새기는 여행입니다.
4. 해외에서 경험하는 무기록 여행 – '남기지 않음'의 용기
① 일본 가고시마 – 화산 옆의 조용한 온천 마을
가고시마는 조용한 온천 마을이 많은 곳입니다. 특히 이부스키나 유노하라 같은 지역은 사진보다 ‘느낌’으로 남는 장소들입니다. 풍경이 특별하다기보다는, 온천에 몸을 담그며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그 시간이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SNS 없이도 감정이 더 짙어지는 경험이 가능합니다.
② 프랑스 루르드 – 순례자의 도시에서 스스로를 만나다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도시 루르드는 종교적 순례지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침묵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휴대폰을 꺼두고 조용히 걷습니다. 기록이 아닌 ‘내면의 정리’를 위한 여행. SNS는 아무 의미가 없는 공간입니다.
③ 몽골 고비 사막 – 전파 없는 대지에서 나를 바라보다
고비 사막은 인터넷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무기록 여행의 시작입니다. 광활한 하늘, 말을 타고 달리는 사막의 바람, 별빛 아래의 침묵. 이곳에서의 감정은 오직 나만이 기억할 수 있습니다. 사진이 남지 않아도, 평생 기억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5. 무기록 여행 실천 가이드 – 준비와 감정의 여백
기록 없는 여행을 실천하려면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 1. SNS 앱 삭제 혹은 로그아웃 – 유혹을 줄이기 위해 일시 삭제하거나, 알림을 꺼두는 것도 좋습니다.
- 2. 별도의 카메라를 챙기지 않기 – 아예 사진을 찍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기록 자체를 잊는 것이 핵심입니다.
- 3. 수첩이나 필기구 챙기기 – 사진 대신 짧은 메모나 그림으로 감정을 남겨보세요. 이 아날로그 방식이 더 오래갑니다.
- 4. 숙소도 '비연결'을 고려 – 와이파이가 없거나 느린 곳, 일부러 인터넷이 약한 지역을 선택해보세요.
- 5. 여행 후에도 SNS에 올리지 않기 – 기록은 나의 기억 안에서만 존재하게 두는 것. 그것이 무기록 여행의 핵심입니다.
6. 기록 없는 여행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까 봐 두려웠습니다. 남기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증명할 수 없을까 봐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무기록 여행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됩니다. 진짜 감정은 기록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을. 오히려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기에, 그 순간에 더 집중하게 되고, 그 기억이 내 안에서 더 명확하게 빛난다는 것을.
SNS 없는 여행은 ‘덜 남기는 여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게 남는 여행’입니다. 그 여행은 타인의 눈이 아니라 나의 감각을 중심에 두고, 화면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며, 댓글이 아닌 바람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기록이 아니라, 더 많은 몰입일지도 모릅니다. 다음 여행에서는 카메라를 잠시 내려두고, 화면을 닫고, 마음을 열어보세요. 아무 것도 찍지 않아도, 아무 곳에도 올리지 않아도, 그 시간은 분명히 당신 안에 깊이 새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여행을 떠올릴 때, 당신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지만, 가장 오래 남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