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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과 마카오의 헌책방 생존기

by 머니인사이트001 2025. 4. 11.

책은 한 도시의 얼굴을 보여주는 가장 조용한 수단입니다. 특히 오래된 헌책방은 문화의 수위선이자, 사라져가는 감성의 마지막 거점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이 글은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속에서도 느린 리듬을 간직한, 홍콩과 마카오의 영문 헌책방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거대한 도시의 골목 어딘가에서 여전히 종이책을 고르고, 사람을 만나며, 기억을 파는 서점들이 존재합니다.

홍콩의 '혼종' 공간, Flow Bookshop

홍콩 센트럴 소호 지역에는 유난히 시끄러운 거리와 조용한 골목이 공존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 오래된 빌딩 1층에 숨어 있는 작은 서점이 있습니다. Flow Bookshop은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영문 중고서점 중 하나로, 1997년에 문을 연 이래 지금까지 줄곧 영문 서적과 함께 살아온 공간입니다.

서점은 이름처럼 흐릅니다. 공간 자체가 특별한 구조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무심히 쌓여 있는 책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시선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영문 문학 고전, 역사서, 여행기, 철학서는 물론, 이제는 절판된 80~90년대 영어 교재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진열대 위 책들엔 누군가의 메모가 남아 있기도 하고, 낡은 책갈피가 꽂혀 있기도 합니다.

Flow Bookshop의 매력은 ‘구매’보다 ‘발견’에 있습니다. 주인은 무언가를 강권하지 않습니다. 그냥 천천히 둘러보고, 읽고, 빠져들다 보면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습니다. 이곳은 현지 외국인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작가 지망생, 번역가, 대학원생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공간입니다. 번화한 도심 한복판에서, 이토록 조용하고 내밀한 장소가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홍콩이 복잡하지만 아름다운 도시임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홍콩과 마카오의 헌책방 생존기
홍콩과 마카오의 헌책방 생존기

기억을 파는 서점, Bleak House Books

Bleak House Books는 이름만큼이나 인상 깊은 철학을 지닌 공간입니다. 홍콩 샌퉁이라는 다소 낯선 동네에 위치한 이 서점은, 한 미국인 부부가 운영하던 독립 서점이었습니다. 2017년 개점 이후 2021년까지 오프라인으로 운영되다가, 현재는 온라인 중심 헌책방으로 전환되었지만, 그 존재감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서점의 철학은 분명했습니다. “책은, 기억을 파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영문 고전문학뿐 아니라 사회운동, 페미니즘, 인권, LGBTQ+ 관련 독립출판물이 큐레이션되어 있었습니다. 단순히 수요에 맞춘 진열이 아니라, 서점 운영자의 사유와 가치관이 반영된 진열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되었습니다.

공간적으로도 Bleak House Books는 특별했습니다. 콘크리트 바닥, 오래된 목재 책장, 그리고 손으로 만든 종이 간판이 어우러진 내부는 마치 유럽의 골동품 서재를 연상케 했습니다. 아이를 위한 작은 독서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으며, 책을 사지 않아도 머무를 수 있는 ‘자유 공간’이 존재했습니다.

오프라인 운영이 종료된 지금도, 서점은 다양한 온라인 행사와 작가 인터뷰, 독립출판물 판매를 지속하며 그 철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서점은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공간을 넘어서, ‘사람들이 기억을 함께 쌓아가는 공동체’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만한 장소입니다.

마카오의 조용한 서재, Pin-to Bookstore

마카오는 카지노와 유럽풍 건축이 공존하는 독특한 도시입니다. 그 속에 감춰진 Pin-to Bookstore는 아주 조용한 반전을 선사합니다. 타이파 섬의 좁은 골목, 벽돌 건물 1층에 자리한 이 서점은 영문·중문 독립출판물, 에세이, 사진집, 예술서적 등을 다루는 공간으로, 마카오의 문화 지도를 바꾸고 있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Pin-to는 ‘핀터레스트’가 아닌, 광동어로 ‘편안한 자리’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름처럼 이 서점은 사람이 책과 책 사이에 편안히 놓일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매장 내부는 크지 않지만, 각 책장의 간격이 넓고, 소파와 테이블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혼자 머물기 좋은 공간’을 지향합니다.

책 구성은 큐레이션 중심입니다. 주인은 지역 작가나 해외 예술가의 소규모 출판물을 직접 들여오며, 각 책에 짧은 해설을 손글씨로 붙여둡니다. 마카오라는 도시 특성상 관광객보다 지역 예술가, 디자인 전공 학생들이 자주 찾는 이곳은, 서점이라기보다 작은 도서관 혹은 아틀리에에 더 가깝습니다.

또한, Pin-to Bookstore는 소규모 전시회, 음악회, 북토크 등을 진행하며 도시 문화의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번화가에 있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장소입니다. 마카오의 예술적 감수성과 지적 깊이를 함께 느끼고 싶다면, 이 서점은 반드시 들러야 할 곳입니다.

도시가 바뀌어도, 책이 사는 공간은 남아야 합니다

홍콩과 마카오는 겉으로 보기엔 화려한 도시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책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Flow Bookshop의 조용한 책장, Bleak House Books의 기억을 담은 공간, Pin-to Bookstore의 예술적인 감성. 이들은 거대한 도시의 속도에 저항하며, ‘느린 생각’의 공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책방 속에서 여전히 누군가는 책을 펼치고, 누군가는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공간을 다시 찾고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