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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라지는 헌책방, 마지막 공간들 (서울, 대전, 부산)

by 머니인사이트001 2025. 4. 10.

한때 도시의 중심에는 헌책방이 있었습니다. 새 책보다 값이 싸다는 이유로, 또는 오래된 책 속에만 있는 문장 하나를 찾기 위해 우리는 그 골목을 찾았습니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헌책방. 그러나 몇몇 도시와 거리에는 아직도 마지막 불빛처럼 남아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이 글은 그 기억의 조각과 현실의 흔적을 따라가 보는 기록이 되어 보겠습니다.

서울 – 청계천 헌책방 거리, 그리고 동네 책방들의 기억

서울에서 헌책방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단연 청계천 헌책방 거리입니다. 조선시대부터 물자와 정보가 모였던 청계천 일대는, 해방 이후 인쇄소와 중고책 거래가 성행하며 자연스레 헌책 골목으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1970~80년대에는 보영서점, 광명서점, 유일서점 등이 줄지어 있었고, 대학가 학생들과 연구자들이 이곳을 매일 드나들었습니다.

지금은 그 숫자가 많이 줄었습니다. 청계천 복원 사업 이후 점포 수는 크게 감소했고, 헌책보다 새 책, 전자책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몇몇 서점은 ‘기록된 시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운영된 서점의 책장 한 켠에는 1960년대 문고판부터 군용 번역서, 절판된 과학 입문서 같은 보물들이 숨어 있습니다.

서울의 또 다른 풍경은 각 지역의 동네 헌책방입니다. 중랑구, 종로, 은평구 일대에도 조용히 운영되는 중고서점이 아직 존재합니다. 이들은 주인장의 삶과 서점의 역사가 얽힌 개인 공간이자, 지역의 문화 거점이기도 합니다. 책을 사러 오는 사람보다 ‘얘기 나누러 오는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이곳에선 현실입니다. 점점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서울의 헌책방은 여전히 기억을 간직한 공간입니다.

한국의 사라지는 헌책방, 마지막 공간들
한국의 사라지는 헌책방, 마지막 공간들

대전 – 책의 도시였던 과거, 그리고 지금

대전은 ‘교통의 중심’이자 ‘지식의 분기점’이었던 도시입니다. 과거에는 서울에서 출판된 책들이 대전을 거쳐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자연스레 중고서점의 중심지 역할도 했습니다. 특히 중앙로, 은행동, 대흥동 일대에는 헌책방이 줄지어 있었고,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 거리에는 학생, 교사, 연구자들이 발길을 끊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서점으로는 한밭서적이 있습니다. 40년 넘게 운영되고 있는 이 서점은 지금도 ‘사라진 책을 찾는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지입니다. 이곳에는 고전 문학, 아동 도서, 인문사회 전공서 등 다방면의 헌책들이 분류되어 있고, 책장에는 손글씨로 적힌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책을 펼치면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과거 독자의 메모가 담겨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흔적들은 헌책이기에만 존재하는 시간의 층입니다.

대전은 지금도 비교적 중고서점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입니다. 대전서림, 학문당 등 몇몇 서점은 아직 영업 중이며, 일부는 온라인 헌책 거래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프라인 서점 특유의 정적이고 깊이 있는 풍경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대전의 헌책방 골목은 과거를 들여다보는 창이자, 아날로그 감성의 마지막 수호자라 할 수 있습니다.

부산 – 보수동 책방골목, 여전히 서 있는 시간

부산의 헌책방 하면 단연 보수동 책방골목입니다. 이곳은 6.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학자들이 서울에서 가져온 책을 헐값에 팔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헌책방 거리로 발전했습니다. 전성기였던 1980년대에는 70개가 넘는 헌책방이 이 거리에 있었고, 대학입시 참고서부터 시집, 외국 문학, 철학서까지 없는 책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10여 개의 서점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 장성서점, 중앙서점, 동양서적은 여전히 운영 중이며, 책장 한 켠에는 50년 전 출판된 ‘금서’까지 조심스럽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서점 주인들은 대부분 60~80대의 노인분들이며, 일부는 아들과 함께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보수동의 가장 큰 특징은 길 자체가 콘텐츠라는 점입니다. 좁은 골목에 나무 간판, 낡은 서가, 포스터, 손으로 적은 가격표 등이 어우러져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시간 여행’ 같은 경험을 제공합니다. 실제로 이 골목은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며, 영화·드라마 촬영지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문객은 늘었어도 책을 사는 사람은 여전히 적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생존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헌책방이기에 가능한 문화’를 지키고 있습니다.

종이책이 사라지는 시대, 헌책방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책은 늘 존재하지만, 헌책방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전자책의 편리함, 인터넷 서점의 확산, 공간 임대료 상승… 이유는 많지만 그 공간만이 가졌던 가치는 대체할 수 없습니다. 청계천의 낡은 책장, 대전서림의 손때 묻은 문고판, 보수동 골목의 향기. 이들은 단순한 서적이 아니라, 세월이 기록된 문화유산입니다.

우리가 헌책방을 기억하고 다시 찾는 이유는, 책을 넘어서 그곳에 깃든 사람과 시간, 도시의 이야기를 다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