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단지 내용을 담는 매체가 아닙니다. 특히 동양에서 책은 하나의 예술품이자, 오랜 시간 축적된 기술의 산물이었습니다. 종이 한 장, 먹 한 줄, 제본 하나에까지 스며든 손의 기술과 미감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그 자체가 문화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한국·중국·일본 3국의 전통 책 제작 과정 중 ‘재료’에 집중하여, 종이·제본·잉크의 문화사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기술적 전통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종이 – 섬유로 빚은 기억의 바탕
동양의 책은 종이 위에 쓰이고, 읽히고, 보관되어야 했기에 무엇보다 ‘지속 가능한 종이’가 필수였습니다. 한국의 한지, 중국의 죽지, 일본의 와시는 모두 섬유 기반 수제 종이로, 나무 펄프가 아닌 풀섬유를 원료로 삼아 내구성과 복원력이 뛰어났습니다.
한국의 한지는 ‘닥나무’라는 식물의 껍질을 벗겨 삶고 두드려 섬유를 분리한 후, 투명한 물 속에 풀을 넣어 떠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전통 기법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으며, 현재 강원도 원주의 원주한지테마파크나 전라북도의 전주한지박물관 등에서 제작과정을 체험하거나 전통 방식 그대로의 한지를 직접 볼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로 대나무 섬유를 기반으로 한 죽지가 발전했습니다. 후한 시기의 채륜이 종이 제작법을 체계화한 이후, 당·송 시대를 거치며 죽지는 고급 문서와 서적의 핵심 재료가 되었으며, 특히 휘주 지역은 전통 수제 죽지 제작의 중심지였습니다. 현재 안후이성 황산 일대의 전통 종이공방에서 고급 죽지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와시는 고대 중국·한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일본 고유의 종이 양식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고치현이나 미노시 등은 전통 와시 생산의 중심지로, 1,000년 이상 이어진 기술을 계승 중이며, 일부 지역은 ‘천년지’로도 불립니다. 와시는 서예뿐 아니라 현대 아트북, 디자인북, 디지털 복원지로도 사용되며 실용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춘 재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제본 – 실과 나무로 엮어낸 기술
책이 된다는 것은 단지 종이를 모아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안정적으로 엮고 보관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동양의 전통 제본은 대부분 실을 이용한 사철제본이나 오침안정법을 사용하였으며, 이것은 책의 장수를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하는 과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궁중 문서나 유교 경전, 의학서 등은 ‘선장본’으로 불리는 사철제본 방식을 택했습니다. 두꺼운 표지와 얇은 속지를 함께 접어 실로 네 군데 혹은 다섯 군데를 감싸며 꿰매는 이 방식은 글을 적은 면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열람이 용이하도록 돕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동의보감 등 대형 문헌도 이 방식으로 제본되었습니다.
한국 문화재청 산하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나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실에서는 선장본의 보존과 복원 기술을 계승하고 있으며, 일부 공방에서는 현대 서적에 선장 기술을 적용한 디자인북도 제작 중입니다.
일본에서는 오침안정법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다섯 개의 바늘 구멍을 일정 간격으로 뚫고, 외부에 실선을 드러내며 책의 무게와 구조를 안정화하는 방식입니다. 일본의 전통 제본 방식은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워, 현대 북디자인에서 차용되거나 미술책 제작에도 자주 활용됩니다.
중국의 경우 명·청대에 발전한 선장본은 대형 관본에서 소형 일상서적까지 널리 쓰였습니다. 중국국가도서관과 항저우, 난징 등의 고문서 복원소에서는 전통 제본 기술을 전문적으로 복원하며, 일부는 국보급 자료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전통 목판과 결합한 이 제본 기술은 중국 고서적이 천 년 이상 유지될 수 있었던 근거 중 하나입니다.
잉크 – 검은 물에 새긴 지혜의 흔적
동양에서 글을 남기는 행위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정신을 남기는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검은 먹물 속에 스며 있었습니다. 먹은 종이 못지않게 중요한 재료였으며, 좋은 먹은 수백 년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안후이성의 휘주묵은 ‘먹의 황제’로 불리며, 송대 이후 전통 먹 제조의 대표로 자리 잡았습니다. 소나무 그을음을 모아 만든 송연묵, 기름을 태워 만든 유묵 등은 모두 각각의 특성과 향기를 지닌 재료로, 서예가와 필경사에 따라 선호가 갈렸습니다. 현재도 휘주 지역의 송묵방 등에서는 수제 먹 제작을 이어가고 있으며, 관광객도 체험이 가능합니다.
한국의 전통 먹 역시 목탄과 식물성 오일을 조합하여 제작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안동, 남원, 전주 등에서 수제 먹 공방이 운영되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의 한국전통묵연합회에서는 옛 제작법을 계승하고 있으며, 일부 장인은 송연묵과 유묵의 혼합방식을 실험하며 고서 보존용 먹으로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먹은 ‘스미(墨)’라고 불리며, 고베나 나라 지역에서 생산이 집중되었습니다. 일본 먹은 먹색이 비교적 진하고 광택이 있으며, 글씨보다 그림을 위한 먹 제작에 특화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일본화에서 사용하는 먹은 안료와 함께 혼합해 사용되며, 현대 동양화에도 여전히 쓰입니다.
먹은 단순한 잉크가 아닙니다. 그것은 흔적을 남기는 도구이자, 수백 년의 시간을 지탱해주는 문화적 기술입니다. 잉크 하나에도 철학과 기후, 예술이 함께 스며들어 있는 것이 동양 책 제작의 특징입니다.
책을 이루는 보이지 않는 손길들
한 장의 종이, 하나의 묶음, 한 줄의 잉크. 그것이 모여 책이 되지만, 이 각각에는 수백 년간 이어진 장인의 손길과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 동양의 책은 단지 글이 쓰인 매체가 아니라, 그 자체가 기술이자 예술이자 문화유산입니다.
우리가 책을 넘길 때 느끼는 감촉과 냄새, 빛의 반사, 활자의 잔상. 그 모든 것은 종이와 실과 먹이 남긴 말 없는 언어들입니다. 책은 단지 읽히는 것이 아니라, 오감으로 기억되는 문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