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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퀴어 출판 생태계와 책 공간 – 목소리가 머무는 장소들

by 머니인사이트001 2025. 4. 14.

성소수자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출판 시장의 가장자리에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이들의 서사는 지워지거나 타인의 시선 아래 소비되어 왔고, 출판이라는 제도 속에서 ‘주체’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아시아 각지에서 퀴어 커뮤니티가 주도하는 출판과 책 공간이 조금씩, 그러나 뚜렷하게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콘텐츠 소비를 넘어서, 자기서사를 쓰고, 아카이빙하며, 커뮤니티와 함께 읽고 말하는 ‘살아 있는 책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글은 한국, 대만, 홍콩, 태국의 퀴어 출판 생태계와 그들의 서점,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감각의 언어에 대한 기록입니다.

한국 – 퀴어의 일상을 연결하는 공간, ‘릿잇’과 ‘그책방’

서울 망원동 골목 안에 자리한 릿잇은 퀴어, 페미니즘, 몸과 젠더에 관한 목소리를 담은 독립출판물들을 전문으로 다루는 독립서점입니다. 외관은 조용하고 소박하지만, 내부에 들어서면 다양한 언어와 감각이 교차하는 진짜 ‘작은 우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의 책장은 장르보다는 이야기 중심으로 큐레이션됩니다. 퀴어 문학, 성소수자 작가의 에세이, 비혼 여성의 삶, 젠더 이론서, 장애/정체성 교차성에 대한 텍스트 등, 사회에서 종종 주변화된 담론이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릿잇은 이런 책들을 단순히 진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모임, 낭독회, 창작 워크숍 등의 형태로 확장하며 책과 삶을 연결하는 접점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공간은 특히 퀴어 창작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합니다. 릿잇에서 열린 퀴어 독립출판 마켓, 논바이너리 주제 북토크, 트랜스 작가의 북런칭 행사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말하기의 훈련장이자 커뮤니티의 안전지대’로 작동합니다.

또 다른 공간은 서울 종로에 위치한 그책방입니다. 이곳은 ‘퀴어+페미니즘’ 큐레이션을 중심으로 운영되며, 매장 내부에는 LGBTQ+ 문학, 사회비평서, 커밍아웃 에세이, 관련 번역서 등이 세심하게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책방의 가장 큰 특징은 큐레이션 메시지입니다. 책마다 붙어 있는 문장과 색감 있는 책갈피는 독자에게 친밀하게 말을 건네며, 단지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행위’로 읽기를 바꿉니다.

아시아 퀴어 출판 생태계와 책 공간 – 목소리가 머무는 장소들
아시아 퀴어 출판 생태계와 책 공간 – 목소리가 머무는 장소들

대만 – 퀴어 큐레이션의 진화, ‘GinGin Store’와 ‘QueerReads Library’

대만 타이베이의 GinGin Store는 대만 최초의 퀴어 전문 편집숍이자 문화공간입니다. 1999년 오픈한 이 공간은 LGBTQ+ 도서, DVD, 굿즈, 잡지 등을 한자리에 모은 큐레이션 스토어로 시작해, 지금은 퀴어 콘텐츠 기반의 전시, 북토크, 워크숍을 아우르는 복합공간으로 성장했습니다.

서점 코너에는 대만 및 해외의 퀴어문학, 페미니즘 서적, 사회 운동 관련 문헌이 비치되어 있으며, 다양한 언어(중문/영문)로 출간된 자료들이 공존합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대만의 퀴어 창작자들이 만든 인디북, 시집, 콜라주 아트북 등이 적극적으로 소개된다는 것입니다. GinGin Store는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퀴어 문화의 전시장’이라고 불릴 만큼 콘텐츠의 폭이 넓고 깊습니다.

또 다른 주목할 공간은 QueerReads Library입니다. 이곳은 비영리 커뮤니티 기반 퀴어 아카이빙 도서관으로, 성소수자 작가의 작품, 연구자료, 드물게 수집된 해외 독립출판물을 모아 열람 제공합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며, 예약제로 공간을 이용할 수 있고, 국내외 연구자, 활동가, 창작자들이 자주 방문합니다.

QueerReads Library는 ‘읽히지 않았던 글의 생존’을 가장 중요한 철학으로 삼습니다. 단지 책을 보존하는 곳이 아니라, 망각될 수 있는 기록들을 연결하고 다시 말하게 하는 커뮤니티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홍콩과 태국 – 감각으로 말하는 서점, ‘Lambda Asia’와 ‘Hardcover: The Art Book Shop’

홍콩의 Lambda Asia는 전통적인 의미의 서점이라기보다, 퀴어 아트와 출판을 교차시켜 새로운 감각적 플랫폼을 만드는 독립 문화 프로젝트입니다. Lambda는 비정기적인 아트북 전시, 퀴어 작가 ZINE 페어, 워크숍을 통해 홍콩 로컬과 아시아 각국 퀴어 창작자들의 작업을 소개하고 있으며, 일부 공간에서는 도서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출판물을 판매하기보다는, ‘감각의 큐레이션’을 강조합니다. 감정, 시선, 질문, 고백 등의 키워드를 기반으로 책과 오브제, 이미지를 함께 배치하며, 전통적인 분류가 아닌 정서적 흐름 중심의 전시로 관람자와의 접점을 형성합니다. 디지털 시대에도 물성을 고집하는 ZINE 문화가 이곳에서 재해석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태국 방콕의 Hardcover: The Art Book Shop은 독립 아트북 서점으로, 퀴어 아티스트들의 인쇄물과 아트북, 시각예술 기반 책들이 다양하게 소개되는 공간입니다. 태국 내 성소수자 예술가들의 작업은 물론, 동남아시아 퀴어 문학 번역서, 페미니즘 이론서도 함께 큐레이션되어 있습니다.

이 공간의 독특한 점은 ‘책을 보고 고르는 공간이자, 전시 관람을 하듯 책을 감각하는 구조’라는 점입니다. 내부는 밝고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책마다 서점 큐레이터의 코멘트 카드가 부착되어 있어 독자와 책이 대화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비정기적으로 아티스트 토크나 출판 워크숍도 운영되며, 퀴어 콘텐츠와 예술 출판의 결합 가능성을 열고 있는 공간입니다.

퀴어 출판은 공간이며, 기억의 언어다

책은 오래전부터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말하기’를 허락해온 도구였습니다. 아시아 곳곳의 퀴어 출판 생태계는 이제 단지 ‘읽히는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함께 구성하고 있습니다. 릿잇의 조용한 진열장, GinGin Store의 생동하는 큐레이션, Hardcover의 감각적 책장. 이 모든 공간은 말 그대로 퀴어한 삶들이 조용히 안착할 수 있는 물리적, 정서적 거처입니다.

퀴어 출판은 더 이상 보조적인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대답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