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은 언제나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말해지고, 어떤 목소리가 유통되는가는 단순히 시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승인’과도 직결됩니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여성, 소수자, 젠더적 소외의 언어는 주류 출판 바깥에서 조용히 생존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시아 곳곳에서 독립출판이라는 방식을 통해 젠더 감수성을 반영한 콘텐츠들이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런 움직임을 이끄는 출판사, 서점, 기획자들을 중심으로 한국, 대만, 일본의 사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국 – 봄알람, 책방 심다: 여성의 삶을 기록하는 출판과 공간
한국에서 ‘페미니즘 독립출판’의 상징적 이름을 꼽자면 단연 봄알람이 빠질 수 없습니다. 봄알람은 2016년, 세 명의 여성 기획자가 시작한 독립출판사로, “사회 안에서 말해지지 않던 여성의 말들”을 기획·출판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봄알람이 처음 주목을 받은 계기는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의 출간이었습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미묘하고 구조적인 차별을 일상 언어로 풀어내며 수많은 독자와 연결되었고, 이후에도 '나는 내 성별이 불편합니다', '며느라기' 등 젠더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선보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봄알람이 단지 출판에 그치지 않고, 독립서점과의 유기적인 연대, 온·오프라인 북토크 기획, 독립 굿즈 제작 등 다각적인 활동을 통해 ‘여성 출판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젠더 이슈에 관심 있는 청년 독자들과 직접 만나고, 여성 서점들과 함께 기획전을 여는 등의 활동은 단순한 콘텐츠 공급자를 넘어 커뮤니티의 축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소개하고 싶은 공간은 책방 심다입니다. 서울 성북구 정릉에 위치한 이 조용한 동네서점은 ‘여성주의 큐레이션’이라는 명확한 철학 아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책방 심다는 여성 작가의 소설, 페미니즘 이론서, 젠더 감수성 있는 동화책 등 폭넓은 스펙트럼의 도서를 소개하고 있으며, 공간 자체가 아늑한 독립 북카페처럼 구성되어 있어 머무는 시간동안 편안함을 느낄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곳의 큐레이션 언어입니다. 책 제목 옆에 놓인 짧은 추천 문장, 책갈피에 적힌 질문들, 그리고 주기적으로 열리는 여성 창작자와의 만남. 책방 심다는 그 자체로 ‘젠더 감수성을 생활화하는 공간’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대만 – FemBooks, Le Pli: 여성 큐레이터의 기획이 빛나는 출판 공간들
대만은 아시아에서 페미니즘 문화운동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착된 국가입니다. 이는 출판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타이베이에 위치한 FemBooks입니다. FemBooks는 1994년에 설립된 대만 최초의 여성 전문 서점으로, 창립 이후 30년 가까이 젠더와 성, 여성 문학, 동성애, 퀴어, 몸에 대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다뤄 왔습니다.
이 공간은 단순한 서점이 아닙니다. 북토크, 작가 강연, 영상 상영회, 몸에 대한 워크숍, 낙태 경험 공유 세션 등 다양한 젠더 중심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지역 여성 커뮤니티의 거점으로 기능합니다. FemBooks의 책장에는 여전히 ‘금기’로 여겨졌던 주제들이 당당하게 꽂혀 있으며, 이는 공간의 큐레이션이 단지 기획을 넘어 ‘저항의 미학’을 품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최근 주목받고 있는 장소는 Le Pli입니다. ‘Le Pli’는 프랑스어로 ‘접힘’을 뜻하며, 미셸 푸코와 들뢰즈의 이론에서 따온 철학적 개념입니다. 이곳은 여성 큐레이터 2인이 운영하는 예술서적 중심의 독립출판 기획 서점으로, 젠더 이론, 미학, 전시 기획 자료, 여성 아티스트의 작업집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간은 카페, 전시실, 책방이 하나로 구성된 복합문화공간이며, 여성 예술가들의 퍼포먼스나 인디 출판물 전시가 비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Le Pli는 전통적인 여성주의 담론을 넘어서, 젠더 개념 자체를 유동적으로 바라보는 큐레이션을 선보이고 있어 대만 젠더 출판의 확장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일본 – Shobunsha, Nitehi Works: 페미니즘 편집과 공간 실험의 경계
일본의 젠더 출판은 오랜 역사 속에서 천천히 진화해왔습니다. 대표적으로 도쿄에 위치한 Shobunsha 는 1980년대부터 일본 여성 문학과 페미니즘 이론서를 집중 출판해 온 독립출판사입니다. 이 출판사는 일본 내 여성주의 이론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최근에도 성폭력 생존자의 증언, 육아 노동에 대한 사회 비평, 퀴어 페미니즘 논의 등을 꾸준히 다루고 있습니다.
Shobunsha는 책의 기획뿐 아니라 편집 방식에서도 실험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러 명의 공동 편집자와 함께 ‘다성적 목소리’를 담은 책을 제작하거나, 집단 토론 형태의 글쓰기를 통해 독자의 사고 개입을 유도하는 형식은 전통적 편집 구조에서 벗어난 독립출판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 주목할 공간은 요코하마의 Nitehi Works입니다. 이곳은 원래 소방서를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아티스트 레지던시, 전시, 독립영화 상영, 그리고 서점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내부의 ‘작은 책방’은 여성 예술가와 창작자 중심의 큐레이션으로 운영되며, 페미니즘 문학, 일러스트 시집, 젠더 관점의 사회비평서가 주로 비치되어 있습니다.
Nitehi Works의 진짜 강점은 ‘공간의 재배치’입니다. 서점, 전시장, 공연장이 번갈아가며 배치되는 유동적 구조는 젠더를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유동적 관계로 받아들이는 시각과 맞닿아 있습니다. 공간 그 자체가 젠더적 발화로 기능하고 있는 셈입니다.
독립출판은 젠더 감수성의 언어를 만든다
젠더는 더 이상 특정한 정치적 구호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상의 구조이고, 관계의 언어이며, 기억을 조직하는 방식입니다. 한국의 봄알람, 대만의 FemBooks, 일본의 Shobunsha. 이들은 모두 독립출판이라는 방식을 통해 거대한 출판 시장 바깥에서 스스로의 언어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독립출판은 소수의 언어를 대변하는 공간이며, 젠더 감수성은 그 언어의 필수적인 감각입니다. 지금 우리가 독립서점에 들어설 때마다 ‘무엇을 읽을까’만이 아니라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가’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