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은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과는 달리, 오늘도 누군가는 A4 한 장에 이야기를 쓰고, 문장을 편집하고, 표지를 디자인합니다. 거대한 출판 시장의 바깥에서 시작된 독립출판은 이제 아시아 각국에서 자신만의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이들이 오래된 서점과 공존하며 완전히 새로운 ‘책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글에서는 타이베이, 서울, 교토에 있는 실제 공간들을 중심으로, 아시아 독립출판의 현재와 오래된 서점의 미래를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대만 – 독립출판의 성지, 타이베이 ‘Pon Ding’
대만 타이베이 중산 지역, 조용한 골목의 계단을 올라가면 다소 수수한 간판이 하나 보입니다. ‘Pon Ding’. 이곳은 대만 독립출판의 아이콘이라 불릴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는 복합문화공간이자 서점입니다. 카페도 아니고, 갤러리도 아니고, 전통적인 서점은 더더욱 아닌 이곳은, ‘독립출판의 현재’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Pon Ding은 원래 미술관 건물 일부를 개조한 곳으로, 전체 공간은 서점, 전시공간, 카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건 책장의 구성입니다. 일반 서점처럼 카테고리로 나누지 않고, 주제, 작가, 편집자 중심으로 큐레이션되어 있으며, 절반 이상은 독립출판물입니다. 그중 다수는 자비출판 혹은 1인 창작물로, 인쇄부수는 100부 이하인 것도 많습니다.
‘읽는 책’보다는 ‘보는 책’, ‘만지는 책’의 비중이 높습니다. 사진집, 일러스트, 시집, 시각적 실험이 가득한 아트북들이 서가를 채웁니다. 무엇보다 이곳의 강점은 ‘책을 사지 않아도 책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넘기고, 벽면 전시를 보며 새로운 작가를 만납니다.
모트 서점은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닙니다. 다양한 독립출판 마켓과 작가 교류회를 개최하며, 타이완 출판 생태계 내에서 ‘공간 기반의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감성과 철저한 콘텐츠 기획이 결합된 이 공간은, 독립출판이 단지 책을 파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운동임을 보여줍니다.
한국 – 독립출판과 헌책방의 만남, 서울 ‘책방 이음’
서울 마포구 합정, 주택가 사이를 걷다 보면 ‘책방 이음’이라는 조그만 간판이 눈에 띕니다. 이곳은 헌책방이자 독립서점이며, 지역문화공간이기도 합니다. 독립출판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 ‘책방 이음’은 단순히 책을 진열하는 곳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이음’ 되는 공간입니다.
이음의 공간은 작습니다. 손바닥만 한 책방에는 정갈한 책장이 세로로 나열되어 있고, 왼쪽에는 독립출판 코너, 오른쪽에는 헌책 구역이 있습니다. 독립출판 코너에는 주인이 직접 선정한 문학, 시, 페미니즘, 사회 이슈 기반 책들이 놓여 있고, 자비출판으로 제작된 손글씨 에세이나 사진 노트도 함께 진열됩니다.
이 공간이 특별한 이유는 ‘헌책과 독립출판이 한 자리에 있는 방식’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헌책방은 과거의 기록을 다루고, 독립서점은 현재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지만 책방 이음은 이 둘을 ‘동시대의 목소리’로 묶습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문학잡지 옆에 2023년 제작된 시집이 놓이고, 과거의 여행기 옆에 로컬 사진작가의 포토북이 함께 배치됩니다.
무엇보다 책방 이음은 북토크, 작은 공연, 글쓰기 수업 등을 통해 독립출판이 ‘단절된 창작’이 아닌 ‘연결된 작업’이 되도록 기획합니다. 공간이 크지 않아 참가자 수는 많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깊은 대화가 오갑니다. 서점 주인은 “이 공간은 책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곳이에요”라고 말합니다. 헌책방과 독립서점이 만났을 때 가능한 공간의 확장, 그것이 이곳에 있습니다.
일본 – 오래된 서점과 독립출판의 조용한 공생, 교토 ‘가마기타 서점’
교토 니죠 지역. 옛 골목과 전통 가옥이 남아 있는 이곳에는 ‘종이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제안하는 책방이 있습니다. 바로 ‘가마기타 서점’. ‘종이 조각과 삶’이라는 이름 그대로, 이곳은 책과 문구, 종이 상품이 조용히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이곳의 특징은 ‘독립출판이 오래된 서점과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는 방식’입니다.
가마기타 서점은 1950년대 지어진 목조 건물을 개조해 만들었습니다. 외관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내부 역시 나무 바닥, 전통 창문, 낮은 천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마치 누군가의 집에 들어선 느낌을 줍니다. 서가는 좁은 복도를 따라 이어져 있고, 문을 열면 나무가 구수한 향기를 내며 인사를 합니다.
이 서점의 절반은 독립출판물, 절반은 고서와 일본 근대문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독립출판 코너에는 작가가 직접 만든 미니북, 팜플렛, 시집, 삽화 노트 등이 있으며, 모든 책에는 손글씨로 작성된 짧은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책들이 현대적인 그래픽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오래된 공간과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가마기타는 책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이 관련 워크숍도 진행합니다. 독립출판 작가가 직접 참여하는 ‘제본 체험’, ‘자필 시집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은 이곳이 단순한 유통 공간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가게 전체에서 흐르는 시간의 밀도입니다. 이곳에서는 책을 사는 것보다, ‘책을 머무는 경험’ 자체가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독립출판과 오래된 서점은 어떻게 공존하는가?
독립출판은 빠르고 작게 움직이는 창작의 방식입니다. 반면 오래된 서점은 느리고 깊은 기록의 공간입니다. 이 두 세계가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대만의 모트 서점은 독립출판의 감각을 전시로 풀어냈고, 서울의 책방 이음은 헌책과 자비출판의 흐름을 하나로 엮었습니다. 교토의 가마기타는 종이와 시간을 기반으로 둘 사이를 아주 자연스럽게 잇고 있습니다.
이 공존은 단지 물리적 공간의 공존이 아니라, 시대 간의 연결입니다. 과거와 현재, 느림과 빠름, 기록과 창작이 조용히 마주치는 공간. 그것이 지금 아시아의 서점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