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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종이들 – 역사 속 희귀 종이 (견지, 엽피지, 수피지 등)

by 머니인사이트001 2025. 4. 17.

우리는 종이를 나무로 만든다고 알고 있지만, 종이의 기원은 꼭 나무에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인류는 기록과 기억을 남기기 위해 주변에 있는 재료들을 활용해 다양한 방식의 ‘종이 아닌 종이’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중 일부는 문명의 흐름 속에서 사라졌고, 일부는 지금도 복원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과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희귀 종이 소재인 견지(비단지), 엽피지(나뭇잎지), 수피지(나무껍질지), 석피지 등 잊힌 재료들을 탐색해봅니다.

사라진 종이들 – 역사 속 희귀 종이
사라진 종이들 – 역사 속 희귀 종이

견지 – 비단 위에 새긴 지식의 흔적

견지는 말 그대로 ‘비단 종이’입니다. 한자로는 ‘견’은 비단, ‘지’는 종이를 의미하며, 원래 종이가 보급되기 전, 또는 고급 문서를 위한 필기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로 중국 한나라~당나라 시기에 성행했으며, 한국과 일본에서도 왕실 문서, 경전, 도장 등의 인쇄나 필사에 사용되었습니다.

비단은 실크 원단으로, 가볍고 광택이 있으며 먹의 흡수성이 낮은 대신 글씨가 선명하게 남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표면이 미끄러워 정교한 붓글씨가 어렵기 때문에, 견지에는 종이보다 더 섬세한 필법과 집중력이 요구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견지에 필사된 문서는 예술적 가치 또한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국 둔황에서 발견된 수천 점의 견지 문서들은 당시 국가기록과 불교경전의 보관 용도로 사용된 예시이며, 한국에서도 백제 금동대향로의 출토지에서 견지에 인쇄된 파편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쇼소인에는 견지에 필사된 고문서가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으며, 일부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대에는 견지를 실크스크린 아트, 고급 제본 커버, 전통 공예 등에 응용하기도 하지만, 제작 비용과 기술적 제약으로 인해 일상적인 재료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지는 단지 종이의 대체재가 아니라, 가장 고귀한 형태의 기록 도구로서 한 시대를 대표했던 재료였습니다.

엽피지와 수피지 – 자연에서 바로 꺼낸 기록 매체

엽피지와 수피지는 나뭇잎과 나무껍질을 직접 가공해 만든 종이입니다. 인도, 네팔,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등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문자 문화 초기에는 매우 일반적인 기록 매체였습니다.

엽피지는 이름 그대로 큰 나뭇잎을 펴고 건조시켜 만든 원시 종이입니다. 대표적으로 인도에서는 ‘타라파타’라 불리는 야자수 잎에 글을 새겨 문서를 남겼습니다. 잎은 일정 크기로 절단되어 양면에 글이 적히고, 중앙에 구멍을 뚫어 실로 꿰매거나 막대를 끼워 보관했습니다. 인도 남부, 스리랑카, 미얀마에서는 불교 경전이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수피지는 나무껍질을 벗겨내 얇게 찢고 건조하거나, 가공하여 평평한 상태로 만든 것으로, 주로 에지르기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티베트와 네팔에서는 다프네 나무껍질, 또는 산벚나무와 무화과 나무 껍질을 사용해 종이를 만들었고, 이를 '로크타 종이'라고 부릅니다. 이 재료는 내구성이 높고, 해충에도 강해 현재까지도 일부 지역에서 수공예 종이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나뭇잎 종이들은 열과 습기에 약하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종이 역할을 해왔으며, 그 위에 적힌 문서들은 종교의식과 법적 효력을 지닌 중요한 기록물로 간주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인도 남부 사원이나 박물관에서는 이 엽피지 문서를 찾아볼 수 있으며, 일부는 디지털화 작업을 통해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 밖의 희귀 종이들 – 석피지, 어피지, 죽피지

종이의 범주는 넓습니다. 역사적으로 지역과 환경에 따라 상상도 못한 재료들이 종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중 일부는 독특한 재료 특성 덕분에 특정 목적에 알맞은 용도로 활용되었고, 일부는 문화적 상징성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석피지는 문자 그대로 돌을 갈아서 만든 종이입니다. ‘석회석’이나 ‘석분’을 분쇄하고 수지와 혼합하여 얇게 펴 만든 이 종이는 현대에 와서 ‘스톤 페이퍼’라는 이름으로 상업화되었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무덤에 넣을 경전이나 오래 보존해야 할 문서에 사용되었다는 일부 기록이 전해집니다. 내수성과 내열성이 뛰어나지만, 제작 비용이 높아 일상용으로는 확산되지 못했습니다.

어피지는 생선 껍질, 특히 연어, 대구, 가오리 등의 피부를 건조하여 만든 특수 종이로, 북극권과 러시아 일부 지역, 알래스카 원주민 사회에서 사용된 바 있습니다. 글씨를 적는 것보다는 표식, 태그, 장식용으로 활용되었으며, 유화나 안료의 베이스로도 쓰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죽피지는 대나무 껍질을 주재료로 삼아 만든 것으로, 고대 중국 남부 지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섬유질이 강하고 습기에 강한 대나무 껍질은 목판 인쇄 초기 종이로 실험되었으며, 일종의 고급 죽간 형태에서 진화한 기록 재료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예는 거의 없으나, 일부 고서에서 죽피지로 추정되는 페이지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희귀 종이들은 실용성과 문화적 특성, 제작 환경에 따라 단명했지만, 그 다양성과 창의성은 인류가 ‘기록’이라는 행위에 얼마나 진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잊힌 종이, 사라진 재료에 담긴 기록의 의지

견지, 엽피지, 수피지, 석피지, 어피지… 이들은 모두 사라지거나 희귀해진 종이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존재했던 시간은 단순한 재료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남기고자 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종이는 없어졌지만, 그 위에 적힌 마음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라진 종이 위에 적힌 문명을 되짚으며, 여전히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존재임을 증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