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다녀온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곳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고. 실제로 하노이나 호치민의 거리에는 여전히 타자기 소리, 누렇게 바랜 종이 냄새, 그리고 고요한 책장이 존재합니다. 책이 잊히고 있는 시대에, 베트남은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듯합니다. 이 글은 단순한 여행 정보가 아닙니다. 하노이와 호치민의 오래된 서점 골목에서 마주한 사람들, 공간, 냄새, 그리고 시간을 기록한 한 편의 도시 탐방기입니다.
하노이의 책 거리
하노이 중심에 자리한 하노이 책 거리는 2017년에 정식 개장한 시립 프로젝트지만, 그 속을 걷다 보면 수십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책문화의 흔적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호안끼엠 호수 근처에 위치한 이 거리는 차량이 통제되어 있고, 좌우로 길게 늘어진 서점들이 사람들을 조용히 반깁니다. 외관은 현대적으로 리모델링됐지만, 내부의 진열 방식이나 오래된 책들의 배열은 고서점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거리는 단순히 책을 파는 장소가 아닙니다. 시 정부가 문화 허브로 조성한 만큼, 작가와의 만남, 독서 캠페인, 어린이 북 클래스 등 다양한 행사가 상시 열립니다. 무엇보다 이 거리에 있는 많은 서점들이 베트남 고전문학, 역사서, 그리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문헌을 여전히 큐레이션해두고 있어 연구자나 문학 애호가들이 자주 찾는 장소로도 유명합니다.
책 외에도 이 거리에는 조용한 카페, 문구점, 일러스트 포스터 상점 등이 함께 있어 반나절을 여유롭게 보내기 좋습니다. 건축적으로도 한옥과 프렌치식 석조건물이 어우러진 이곳은 단순한 독서 장소를 넘어선 하나의 문화적 배경입니다. 하노이 특유의 정적이고 클래식한 분위기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곳이 그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50년 역사의 하노이 고서점
마오 서점은 책을 사랑하는 하노이 시민들 사이에서는 ‘전설’처럼 회자되는 공간입니다. 이 서점은 1950년대 후반, 구 하노이 중심부의 복잡한 상가 2층에 자리잡았으며, 겉에서 보면 발견하기 어려운 ‘숨은 명소’입니다. 좁은 골목을 지나 낡은 철계단을 올라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이 서점은, 그 자체로 하나의 ‘탐험’입니다.
서점 내부는 벽을 따라 빼곡하게 책장이 채워져 있고, 가운데 테이블에는 무심하게 쌓인 책더미가 자리합니다. 대부분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문헌, 베트남 현대 문학, 사회주의 시절의 정치 자료 등 1960~90년대 인쇄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서의 비율이 상당히 높아, 책을 한 권 꺼낼 때마다 종이에서 나는 묵직한 향이 공간 전체를 채웁니다.
서점 주인 마오 씨는 80대에 가까운 연세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책에 대한 짧은 소개나 추천을 해주십니다. “이 책은 1973년 첫판, 표지가 원본입니다”라며 책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표현합니다. 외국어 서적도 다수 보유하고 있어, 여행자들도 충분히 탐독할 수 있으며, 조용히 머물며 책을 볼 수 있는 의자도 마련돼 있습니다. 이 서점은 책이란 물성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는지를 되새기게 해주는 공간입니다.
호치민의 서점 골목
베트남 최대 도시 호치민에는 호치민 서점 골목 이라는 독특한 공간이 있습니다. 노트르담 성당 옆,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이 책 거리는 야외 서점가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대로변의 소음과는 다른 조용한 분위기를 제공합니다. 2016년에 공식 조성된 이 거리에는 10여 개의 서점, 북카페, 독립출판 부스 등이 나란히 이어져 있어 문화 애호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 거리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오래된 고서와 현대적인 독립출판물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거리 한쪽에는 헌책을 중심으로 한 부스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미국 전쟁 시기 군용 매뉴얼, 80년대 경제신문, 과거 교과서 등이 여전히 거래되고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베트남어이지만, 영어·불어 번역본도 꽤 많이 보유하고 있어 외국인 관광객들도 흥미롭게 둘러볼 수 있습니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야외 테이블,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북카페는 책을 고른 후 머물기에 이상적인 공간입니다. 특히 주말 오후에는 젊은 작가의 북사인회, 시 낭독회 등 작지만 깊은 문화 행사가 열리며, 지역 주민과 여행자가 자연스럽게 섞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호치민이 보여주는 책의 힘은 바로 이런 일상 속 연결성에 있습니다.
트랜 후이 리우 거리의 숨은 헌책방들
Tran Huy Lieu Street는 호치민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푸년 지역의 조용한 거리로, 과거부터 지금까지 헌책방 밀집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거리에는 간판도, 조명도 화려하지 않은 오래된 서점들이 10여 곳 이어져 있으며, 골목 안 골목을 따라 작은 상점들이 숨겨져 있어 ‘책 탐험’을 하는 듯한 기분을 줍니다.
이 지역의 서점들은 대부분 30년 이상 된 개인 운영 서점이며, 진열 방식도 다소 무질서합니다. 책은 선반보다 박스 안에, 진열대보다 테이블 위에 무심히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보물 같은 책들이 숨어 있습니다. 구 베트남 공화국 시절 문헌, 희귀 역사서, 문학 초판본 등을 찾는 수집가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할 정도로 컬렉션 가치가 높은 편입니다.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서점 주인이 ‘협의가 가능한 가격’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단골 고객이라면 간단한 흥정으로 좋은 가격에 고서를 구매할 수 있으며, 어떤 책은 교환도 가능합니다. 이 거리는 특히 사진 촬영을 좋아하는 여행자들에게 인기이며, 곳곳에 세월을 고스란히 머금은 가구와 표지, 포스터 등이 연출되어 있어 촬영 배경으로도 정말 좋습니다.
베트남 서점 골목은 여전히 ‘종이의 나라’입니다
디지털 시대가 지배적인 지금, 베트남은 여전히 종이책이 중심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 중심에는 하노이와 호치민의 고서점과 책 골목들이 있습니다. 이곳은 단순히 오래된 책을 파는 장소가 아니라, 시간과 기억, 지역성과 사람이 얽힌 문화적 공간입니다. 마오 서점의 낡은 계단, 트랜 후이 리우 거리의 고요한 책더미, 응우옌반빈 거리의 북사인회 모두가 ‘책이 살아있는 도시’ 베트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행지에서 특별한 감성을 찾고 싶다면, 베트남의 서점 골목을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는 조용하지만 깊고, 낡았지만 아름다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