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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퀴어 출판과 온라인 ZINE 플랫폼(한국,필리필,말레이시아)

by 머니인사이트001 2025. 4. 14.

출판은 더 이상 종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디지털 기술은 출판의 형식을 바꾸었고, 특히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소수자 집단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퀴어 커뮤니티의 창작자들은 지금, 오프라인 공간을 넘어 웹 기반의 플랫폼과 ZINE 프로젝트를 통해 말하고 기록하며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아시아를 중심으로 퀴어 출판의 디지털화 흐름을 보여주는 실제 사례들을 통해, ZINE이 어떻게 ‘말할 수 있는 언어의 방식’을 바꾸고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한국 – QPUP.kr: 퀴어 창작자의 자율성과 공동체성을 연결하는 웹 플랫폼

큐펍은 2021년 한국에서 시작된 퀴어 중심의 독립출판 웹 플랫폼입니다. 이름은 “Queer Publishing Platform”의 줄임말로, 국내외 성소수자 창작자들이 자신의 ZINE, 디지털 인쇄물, 서사적 실험물을 업로드하고 공유할 수 있는 온라인 기반의 자율 공간입니다.

큐펍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서사의 자유로운 형식화’입니다. 텍스트뿐 아니라 일러스트, 사진, 콜라주, 오디오북 형식까지 지원되며, 사용자들은 완성된 결과물을 PDF 혹은 웹페이지 형태로 직접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이트 내에서 검색 가능한 키워드로 큐레이션이 이루어지며, 퀴어 내에서도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비혼여성, 장애 퀴어 등의 다층적 정체성이 중심화됩니다.

이 플랫폼은 단순한 콘텐츠 아카이빙을 넘어서, 창작자 커뮤니티를 지향합니다. 정기적으로 ‘온라인 리딩룸’, ‘디지털 ZINE 읽기 클럽’, ‘자기서사 툴킷 워크숍’ 등을 진행하며, 참가자들은 서로의 작업을 비평하거나 협업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큐펍은 플랫폼 운영비를 창작자 후원 및 일부 유료 ZINE 판매로 충당하며, 탈중앙적이고 비영리적인 운영 철학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오프라인 출판이 비용과 유통에서 갖는 한계를 넘어서, 큐펍은 ‘누구나 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현하는 대표적인 국내 플랫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필리핀 – Gantala Press: 퀴어-페미니스트 디지털 출판의 정치성과 공동체성

필리핀 마닐라에 기반을 둔 Gantala Press는 2017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페미니스트-퀴어 출판 집단입니다. ‘Gantala’는 타갈로그어로 ‘말하는 여자’를 뜻하며, 여성 및 성소수자 창작자들의 경험과 언어를 기록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출발했습니다.

Gantala는 오프라인 ZINE도 제작하지만, 그 대부분은 PDF 및 ePUB 형태로 디지털로 배포됩니다. 출판물은 다국어로 구성되며, 영어와 타갈로그어가 병기되는 경우가 많고, 어떤 경우는 특정 지역 방언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지역성과 정체성의 교차성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이들의 대표적인 시리즈는 'May Tiyanak sa Loob ng Aking Bag' (내 가방 안엔 악령이 있어요), 'Gantala: Writings from Women Who Resist' 등으로, 퀴어 여성, 노동자, 농민, 성노동자, 트랜스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와 시, 짧은 서사가 혼합된 형태로 구성됩니다.

Gantala Press는 단지 콘텐츠를 올리는 플랫폼이 아니라, 창작자를 위한 실질적 사회 연결망도 제공합니다.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워크숍, ZINE 제작 튜토리얼, 디지털 페미니스트 캠프 등을 통해 필리핀 전역은 물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등 인접국가의 창작자들과도 연대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출판이라는 행위가 곧 ‘존재의 증명’이 되는 현실에서, Gantala는 책을 매개로 퀴어 커뮤니티의 정치적 서사와 일상의 미시사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퀴어 출판과 온라인 ZINE 플랫폼
디지털 시대의 퀴어 출판과 온라인 ZINE 플랫폼

말레이시아 – Stitching Solidarity: 소수자 몸과 기억을 엮는 ZINE 프로젝트

Stitching Solidarity는 말레이시아의 비영리 예술/출판 프로젝트로, 퀴어, 여성, 난민,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소수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창작 기반 ZINE을 디지털로 배포합니다. ‘Stitching’이라는 이름은 ‘꿰매다, 연결하다’는 뜻처럼,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느슨하지만 강하게 엮어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2020년부터 비정기적으로 ZINE 시리즈를 발행하고 있으며, 제작된 콘텐츠는 웹사이트를 통해 누구나 자유롭게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형식은 매우 실험적이며, 사진과 시, 짧은 질문, 유년기의 기억, 거주지 지도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고, 마치 ‘디지털 감각의 수첩’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2022년 발행된 시리즈 'On Gendered Silence' 에서는 트랜스 여성, 비혼 중년 여성, 무슬림 퀴어 창작자 등 말레이시아 내에서도 더욱 취약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침묵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뤘습니다. 이 ZINE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온라인에서 댓글, 메모, 리믹스를 통해 콘텐츠를 ‘다시 쓰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Stitching Solidarity는 디지털 플랫폼이 갖는 인터랙티브한 가능성을 적극 활용하며, 퀴어 서사의 물성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책은 고정된 산문이 아니라, 관계와 경험이 덧붙여지며 진화하는 ‘살아 있는 문장’입니다.

디지털 ZINE은 새로운 말하기의 형식이다

디지털 ZINE은 단지 ‘쉽게 만들 수 있는 출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존의 출판 시스템에서 배제되었던 말들, 소수자의 말들, 비정형적인 경험들을 담을 수 있는 유연한 언어 형식입니다. QPUP.kr이 국내 퀴어 창작자에게 플랫폼을 제공하고, Gantala Press가 아시아 퀴어 페미니스트 출판 연대를 확장하고, Stitching Solidarity가 디지털 실험과 기억의 엮기를 통해 새로운 서사의 지평을 연 것처럼, 디지털 ZINE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말해지지 않은 수많은 존재들에게 말할 수 있는 형식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출판은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어의 윤리를 다지는 구조입니다. 디지털 ZINE은 그 윤리를 재정의하며, 소수자 서사의 지속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