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고 하면 보통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골목, 태국의 시장, 프랑스의 골목 카페처럼 익숙한 곳을 벗어나야만 비로소 여행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한국 안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익숙한 도시의 골목을 걷다가도, 낯선 언어와 향신료, 의상과 시선이 뒤섞인 공간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한국만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다문화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조금만 시선을 바꾸면, 국경을 넘지 않아도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 글은 ‘한국에서 떠나는 세계 여행’을 주제로 합니다. 서울 이태원, 안산 다문화거리, 대구 서문시장 인근, 부천 송내 차이나타운처럼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세계의 작은 단면들을 조명하며, 여행이란 결국 물리적 이동보다 감각과 관점의 문제임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준비물은 없습니다. 다만, 열린 마음과 낯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태도면 충분합니다.
1. 서울 이태원 –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가 교차하는 동네
이태원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다문화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장소입니다. 한때 미군기지의 영향 아래 외국인 밀집지역으로 형성되었고, 이후 자연스럽게 다양한 국적의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의 이태원은 중동의 이슬람 문화, 동남아의 길거리 음식, 아프리카 이민자들의 소형 상점이 공존하는 독특한 도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경리단길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우사단로'가 나옵니다. 이 길은 서울 속의 ‘리틀 이슬람’이라 불릴 정도로 아랍권 문화가 밀집해 있습니다. 이태원 모스크(중앙성원)는 그 중심입니다. 매주 금요일이면 수백 명의 무슬림이 예배를 위해 모이고, 그 길목을 따라 할랄푸드 식당, 터키식 케밥 가게, 이슬람 서점 등이 줄지어 있습니다.
이태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여행’은 음식에서 특히 강렬합니다. 레바논의 후무스, 터키의 도넬 케밥, 파키스탄의 비리야니, 이란의 샤프란 향신료 등은 이국적인 향과 맛으로 감각을 자극합니다. 현지인에게 직접 조리법을 물어볼 수도 있고, 할랄마트에서 이색 식재료를 구매해 나만의 요리를 시도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흥미로운 경험은 ‘언어’입니다. 하루에만도 영어, 아랍어, 우르두어, 프랑스어, 한국어 등 수많은 언어가 뒤섞입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들리는 이런 언어들은 낯설지만 동시에 풍성한 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태원은 한국에 있으면서도, 국경과 민족, 종교와 언어의 다양성을 직접 걷고 만질 수 있는 ‘살아 있는 세계’입니다.
2. 안산 다문화거리 – 이주민과 함께 살아가는 도시
서울에서 1시간 거리, 경기 서남부에 위치한 안산은 한국에서 다문화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2024년 현재 안산의 외국인 주민은 전체 인구의 약 12%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네팔, 우즈베키스탄 등 아시아 각국에서 온 이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다문화거리’라 불리는 이곳은 고잔역과 원곡동 사이에 위치하며, 마치 한 도시 안에 여러 개의 문화지구가 병존하는 느낌을 줍니다. 골목마다 다른 언어가 적혀 있고, 표지판에는 한글 외에 베트남어, 중국어, 타갈로그어가 병기되어 있습니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마치 동남아시아 도시에 온 듯한 이질감마저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거리의 가장 큰 매력은 ‘생활감’입니다. 관광지가 아닌 실제 삶의 터전이기 때문에, 거리 곳곳에서 이주민 가족의 생활이 묻어납니다. 네팔인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는 달걀 커리와 로띠를 맛볼 수 있고, 필리핀 마켓에서는 망고주스와 현지 과자를 판매합니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다문화 장터에서는 각국의 전통 의상, 공예품, 식재료가 거래되며, 한국인 방문객들과의 자연스러운 교류도 이뤄집니다.
특히 안산은 ‘외국인과 함께 살아가는 도시’를 지향하며, 공공기관과 커뮤니티가 공존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외국인 전용 병원, 다문화도서관, 통역 지원센터 등은 이방인이 아닌 '이웃'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산은 단순한 ‘다문화 테마 거리’가 아니라, 한국 속에서 ‘다른 문화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배울 수 있는 살아있는 교육장이기도 합니다.
3. 대구 서문시장 – 다문화의 중심에서 지역과 섞이다
대구는 전통적으로 보수적이고 동질성이 강한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이 꾸준히 유입되며 점차 변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구 서문시장 인근은 ‘조용한 다문화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시장 내부에는 네팔,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출신의 상인이 운영하는 식당과 가게가 늘어나고 있고, 주변에는 이주민 커뮤니티와 결혼이주여성 모임이 형성돼 있습니다.
이 지역의 가장 큰 매력은 ‘관광지화되지 않은 진짜 문화’입니다. 간판도 낡았고, 가게 외관도 소박하지만 그 안에서는 현지인만 알 수 있는 깊은 맛과 정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구에는 인도식 채식 식당, 파키스탄 향신료 전문점, 네팔어만 적혀 있는 식료품점 등이 존재하며, 이 모든 것이 지역 주민의 삶 속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여행은 조용합니다. 관광객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상점과, 한국말이 서툴지만 따뜻한 눈빛을 가진 상인의 응대. 정해진 ‘코스’는 없지만, 시장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저절로 여행이 됩니다. 한국인 방문자들은 이 거리에서 단지 ‘이국적 풍경’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공존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4. 부천 송내 차이나타운 – 익숙한 듯 낯선 중국 속으로
서울 인근에 중국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인천 차이나타운보다 상업화되지 않은 부천 송내 차이나타운은 실제 조선족 이주민과 중국 화교들이 밀집한 지역으로, 음식과 언어, 문화가 ‘실제처럼’ 구현된 공간입니다. 중화요리라는 단어 안에 다 담기지 않는 다양한 중국 요리를 맛볼 수 있고, 거리에는 중국어 안내판이 자연스럽게 공존합니다.
이곳에서는 길거리 음식으로 판매되는 중국식 전병(煎饼), 마라탕, 중국식 밀크티 외에도 중국 전통혼례 의상 대여, 서예 도장 만들기 같은 체험도 가능해 ‘미니 차이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무엇보다 관광지가 아닌 생활공간이기에, ‘관찰자’가 아닌 ‘잠시 머무는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입니다.
5. 한국 안의 세계 – 관점을 바꾸면 도시는 여행이 된다
우리는 늘 외국을 떠나야만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그 자체로 ‘다문화 행성’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외국인 주민 250만 명 시대. 그들은 더 이상 ‘손님’이 아니라, 이 사회를 함께 구성해가는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공간은 우리가 떠나지 않고도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여행지’가 됩니다.
이 글에서 소개한 지역들은 단순한 ‘이색 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언어, 다른 피부, 다른 사고방식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는 이 거리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나는 얼마나 타인을 낯설게 보는가, 나는 어디까지 열려 있는가. 여행은 결국 질문입니다. 그리고 다문화 공간은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이고 효과적인 장소입니다.
해외여행이 어려운 시대, 또는 비행기 없이도 충분한 감정을 느끼고 싶은 시기. 당신은 서울, 안산, 대구, 부천의 골목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세계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 곁,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곳에서 조용히 말을 걸어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