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의 삶은 빠릅니다. 오늘도 어디론가 급히 가고, 일정은 촘촘하게 짜여 있으며, 도착지가 중요한 세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득,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잊고 지낸 것들—창밖을 한참 바라보는 시간,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듣는 여유, 낯선 정차역에서 느껴지는 막연한 향수. 그것들이 그리워질 때, ‘기차 여행’이 떠오릅니다.
기차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지만, 동시에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 합니다. 목적지에만 집중하게 되는 자동차, 목적지마저 날려버리는 비행기와 달리, 기차는 '이동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게 하는 특별한 탈것입니다. 이 글은 '기차로만 전국 일주하기'라는 특별한 여행의 서사입니다. 차가 없어서가 아니라, 느린 여행이 필요해서 택한 기차. 그 슬로우 트랙 위의 여정을 자세히 풀어보려 합니다.
1. 기차 여행의 시작 – 느리게 떠나는 법을 배운다
서울역, 여전히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으로 붐비는 곳입니다. 대부분은 빠른 KTX를 타고 목적지만을 바라보지만, 나는 일부러 ITX, 무궁화호, 새마을호를 타기로 했습니다. 느린 속도만큼 창밖 풍경도 더 오래 머물렀고, 짧은 정차 시간에도 플랫폼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기차 여행의 시작입니다. 빠르지 않아 좋고, 정차해줘서 더 고마운 여행.
‘전국 일주’를 정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노선표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KTX만으로도 전국 대부분을 빠르게 돌 수 있지만, 이 여행의 핵심은 '느리게, 오래 머물며,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오래된 노선, 환승이 필요한 역, 그리고 여행객보다 지역민이 많은 정차역들을 중심으로 루트를 계획했습니다.
루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 – 춘천 – 강릉 – 대전 – 목포 – 순천 – 부산 – 경주 – 서울 모두 기차로만 이동하며, 각 도시에서 1박 이상을 하며 지역의 시간에 나를 맞추는 여정입니다.
2. 동해를 따라 걷는 감정 – 서울에서 강릉까지
서울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경춘선을 따라 춘천으로 향합니다. 춘천은 많은 이들에게 익숙하지만, 기차를 타고 도착한 춘천은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역을 빠져나오자마자 펼쳐지는 낡은 간판과 강변 풍경은, 어린 시절 소풍 같기도 했고, 오래된 드라마의 한 장면 같기도 했습니다. 닭갈비보다 더 오래 기억나는 건, 강변 벤치에 앉아 있던 시간과 기차가 지나가는 철교를 바라보며 마셨던 아이스커피 한 잔이었습니다.
춘천에서 ITX-청춘을 타고 강릉으로 향하는 길은, 한국의 기차 여행 중 가장 아름다운 노선 중 하나입니다. 철길 옆으로 펼쳐지는 산과 호수, 도심이 아닌 들판이 이어집니다. 열차는 느리게 휘돌아가지만, 그 느림 속에서 눈은 더 바빠집니다. 강릉에 도착하니, 기차에서 본 바다가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카페거리 대신 바다 바로 앞의 민박집에 묵었습니다. 와이파이도 잘 잡히지 않았지만, 그날 밤 별이 너무 선명했습니다.
강릉에서의 하루는 바다를 보는 시간으로 충분했습니다. 모래사장에 앉아 기차가 지나가는 철로를 바라보며 들었던 감정. '어디에도 가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라는 건, 기차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감정이었습니다.
3. 남쪽으로의 전환 – 대전, 목포, 그리고 순천
강릉에서 대전까지는 한 번 환승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일부러 넉넉히 잡았습니다.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마저도 여행이었기 때문입니다. 무궁화호는 20분 늦게 도착했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마저도 여정의 일부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대전은 평범한 도시 같았지만, 철도와 관련된 박물관, 오래된 역 주변의 간이식당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목포는 기차로 향하면 더욱 특별한 도시입니다. 서해 끝자락에서 기차가 멈추는 순간, 나 역시 모든 생각을 멈추게 됩니다. 바다를 따라 걷는 산책길, 오래된 항구와 시장 골목. 다른 도시들보다도 느린 속도의 도시였고, 기차를 타고 도착했기에 가능한 밀도 높은 여정이었습니다.
순천은 이 여행에서 가장 감성적인 정차역이었습니다. 순천만 국가정원은 유명하지만, 순천역에서 걸어가는 길 자체가 힐링이었습니다. 이정표가 많지 않았고, 중간에 길을 두어 번 헤맸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나를 만나게 됩니다. 순천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기차 여행자들끼리 모여 소소한 맥주 파티도 했습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출발했지만 같은 열차를 탄 사람들끼리의 대화는 예상치 못한 선물 같았습니다.
4. 동해를 돌아 다시 남쪽으로 – 부산, 경주, 서울
순천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길은 바다를 끼고 이동하는 완행열차 루트였습니다. 빠른 KTX를 이용하면 훨씬 빨리 갈 수 있지만, 일부러 무궁화호를 타고 바다를 따라 이동했습니다. 창밖의 풍경은 끊임없이 변했지만, 기차는 조용히 그 위를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창문을 활짝 열 수 없는 KTX와 달리, 무궁화호의 창문은 작고 오래됐지만 그 안에서 보는 풍경은 더 가까웠습니다.
부산은 기차로 도착해야 제 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시의 복잡함도, 사람들의 활기참도, 그리고 바다도 모두 기차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갑니다. 부산역 근처 찜질방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에 자갈치 시장을 걸었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 공존해온 삶의 흔적이 있었고, 기차 여행자에게 그 정취는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경주는 마지막으로 향한 도시였습니다. KTX 신경주역이 아닌, 구 경주역 쪽으로 무궁화호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경주는 빠르게 둘러보기보다는 천천히 오래 걷는 도시입니다. 황리단길, 대릉원, 교촌마을을 무작정 걷고, 덥거나 지치면 그늘에서 쉬었습니다. 기차 시간은 미리 정해져 있었기에, 그때까지는 오롯이 이 도시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5.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 여행은 목적지가 아니었다
경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이번 여행을 돌아보았습니다. 자동차로 갔다면 보지 못했을 창밖 풍경들, 비행기를 탔다면 지나쳤을 작은 정차역들, 너무 빠른 여행에서는 놓치고 말았을 사람들의 표정들. 그 모든 것이 기차 여행이었기에 가능했던 감정이었습니다.
기차로만 전국을 일주하는 건, 단순한 도전이나 실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잊고 살았던 감정과 풍경, 그리고 삶의 속도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느리게 흘러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웃는 법, 출발과 도착 사이의 시간을 충분히 누리는 법. 기차는 그것을 조용히 가르쳐주었습니다.
6. 기차 여행이 주는 진짜 의미 – 우리에게 여백이 필요한 이유
기차 여행은 결국, 여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간을 압축하지 않고, 길 위의 감정에 집중하며, 도착보다 여정 자체를 사랑하는 방식.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놓치며 살아왔습니다. 목적지를 향한 속도에 매몰되어, 창밖의 사소한 아름다움을 외면해왔고, 그로 인해 감정의 결이 메말라 왔습니다.
기차를 타면 비로소 알게 됩니다. 느려도 괜찮고, 멈춰도 괜찮고, 심지어 방향을 잃어도 괜찮다는 것을. 그 모든 시간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지만, 내 안에 선명하게 새겨진다는 것을.
당신이 지금 삶에 지쳐 있다면, 이번에는 자동차 대신 기차를 선택해보세요. 목적지는 같아도, 당신이 느끼게 될 여행은 전혀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느림의 속도에서 당신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진짜 나’를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