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낡고 바래집니다. 하지만 어떤 책들은 단순한 인쇄물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며, 후대에 반드시 전해져야 할 문화유산이 됩니다. 그런 책들을 지켜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수백 년의 시간을 견딘 고서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장인들, 그리고 과학과 기술을 결합해 책의 생명을 연장하는 전문가들입니다. 이 글은 한국, 일본, 중국의 실제 고서 복원 기관과 사례를 중심으로, 고서가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보존과: 종이 위에 생명을 덧입히는 기술
서울 반포에 위치한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보존과는 한국 고서 복원의 핵심 기관 중 하나입니다. 이곳에서는 국보급 서적부터 지역 고문헌까지 폭넓은 범위의 도서를 복원·보존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수공예 기법과 현대 과학기술이 동시에 활용됩니다.
대표적인 복원 사례로는 '동의보감', '조선왕조실록'의 일부 필사본, '정본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서는 대부분 한지로 인쇄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종이가 산화되거나 곰팡이에 노출되고, 벌레에 의해 훼손되기도 합니다.
복원 과정은 크게 1.오염 제거 2.표면 세척 3.손상 부위 보강 4.보존 포장으로 이루어지며, 특히 ‘한지 덧댐’ 기법이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이는 닥나무 섬유로 만든 전통 한지를 사용해 손상된 종이를 원형에 가깝게 보수하는 방식입니다. 모든 작업은 수작업으로 진행되며, 책의 제본 방식까지 고려해 복원이 이뤄집니다.
또한 국립중앙도서관은 디지털 보존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복원 완료된 도서는 고해상도 스캔 및 메타데이터 입력을 통해 디지털 도서관에서 열람 가능하도록 구축하고 있으며, 이는 후속 연구 및 대중 교육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고서 복원은 단지 ‘옛것을 살리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억과 기록을 후대에 남기는 사회적 작업이며, 기술과 장인의 손끝이 만나 만들어지는 과학적 예술입니다.
일본 – 도쿄국립박물관 보존센터: 종이 한 장에도 수명을 부여하는 장인정신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 보존센터는 동양 고문서 및 서적의 보존 복원 분야에서 아시아 최고 수준의 전문성을 자랑합니다. 이곳에서는 에도 시대의 목판본부터 메이지 시대의 근대 문헌까지 다양한 도서가 과학적 방식으로 복원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전통 제본 방식인 ‘오침안정법’을 고려한 복원 작업이 특징이며, 제본 실 재현, 종이 두께 복원, 곰팡이 제거에 있어서 일본 고유의 기술이 적용됩니다. 특히 도쿄박물관은 ‘온도·습도 자동조절 보관소’를 보유하고 있어, 복원된 도서의 장기 보존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합니다.
복원 전 과정은 전문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수행하며, 작업 전에는 반드시 ‘X-ray 형광분석’, ‘종이섬유 분석기’를 활용해 원 재료에 대한 이해를 먼저 진행합니다. 이는 복원 후에도 원형에 최대한 가깝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사전 조치입니다.
한편, 도쿄국립박물관 공식 웹사이트에서는 복원 전후 사진과 작업기록을 일부 공개하고 있으며, 이는 대중의 이해도를 높이고 후속 연구자들에게는 소중한 데이터베이스가 됩니다.
일본의 고서 복원은 단지 보존을 넘어서 ‘지속 가능한 문화’로서의 책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주며, 문화재 보존에 있어 공공성과 장인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중국 – 중국국가도서관 고서복원실: 천 년의 지식을 현재로 되살리는 기술력
베이징에 위치한 중국국가도서관 고서복원실은 세계 최대 규모의 고서 보존 전문 기관 중 하나입니다. 2천만 권이 넘는 고서와 고문헌이 소장된 이 도서관에서는, 한 해 수백 권의 고서를 복원하며 ‘지식 유산’을 실질적으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복원 대상은 진나라 대나무 간부터 당·송·명·청대의 필사본과 목판본까지 다양합니다. 특히 명나라 시기의 영락대전 복원 프로젝트는 중국 내에서 큰 화제가 되었으며, 파손된 수백 장의 페이지를 복원하고 디지털로 재현하는 데 10년 이상이 소요되었습니다.
복원 기술은 전통 공예와 현대 기술이 결합된 형태로, 중국 고유의 ‘죽지 복원기법’, 천연 약제를 활용한 살균 처리, 정밀 제본 복원 기술 등이 활용됩니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는 AI 기반 이미지 복원 및 손글씨 인식 기술을 도입하여 고서의 내용을 디지털 형태로 복원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국국가도서관은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고서 복원 사례를 일부 공개하고 있으며, 일반인도 제한적으로 복원 과정을 견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이는 문화유산 보존을 국가 프로젝트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 기관은 고서 복원이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 보존의 철학’임을 실천하고 있으며, 과거의 지식을 현재로 되살리는 가장 직접적인 현장 중 하나입니다.
책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도쿄국립박물관, 중국국가도서관. 이 세 곳의 공통점은 단지 오래된 책을 수리하는 곳이 아니라, 지식과 시간, 기억을 되살리는 장소라는 점입니다. 종이가 닳고 먹이 바래도, 책이 담고 있던 정신과 문화는 복원을 통해 다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책은 읽히는 것을 넘어, 남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김’을 책임지는 복원 현장은 인류가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한 조용한 약속의 공간입니다.